서론
코로나 펜데믹 장기화로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지만 요즘 하늘은 너무도 맑고 청명하기 그지없다. 대면예배의 인원을 제한하는 상황이지만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영성 회복의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봐라보며 하나님의 우주창조의 장대함이나 유쾌함 같은 감정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과 영성에 고장이 나지 않았나? 점검이 필요하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1~6) 그렇다 하늘과 창공에까지 펼쳐진 시편 기자의 마음은 우주만큼 드넓은 상상력과 스케일이 정말 대단하다. 시편기자에 비하면 우리들의 속은 너무도 좁고 근시안적이지 않은가 싶다. 사소한 일상에도 아옹다옹 질투하고 자기주장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버럭 화를 내며 혈기부리는 우리의 옹졸했던 부끄러움에 마음이 숙연해 진다. 시편기자는 날마다 경험하는 낮과 밤의 반복 속에서 어떻게 우주적인 인격의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낮이 낮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려준다고 상상 할 수 있었을까?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하는 감수성과 신성한 충만감의 기쁨은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보면서 절정이다.
본론
시편 19편은 한 사람의 기자가 썼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주제와 언어가 상이하고 두 개의 독립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6)은 시편기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굵은 언어로 보이는 우주 창조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면, (19:7~14)은 그 주제가 교훈과 말씀으로 마음의 생각에 집중하여 내면의 우주 창조를 찬양한다. 왜 시편기자는 주제와 형식이 다른 시편을 하나의 시편으로 기록하면서 보이는 우주 창조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교훈과 말씀을 찬양할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 7-14)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영광과 자연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의 교훈을 칭송하는 것 사이에는 논리의 연관성은 부족하여도 시편 19편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통일된 논리의 확실성은 독립된 두 개의 시편을 하나의 시로 묶게 한 시인의 영성의 풍부함이 있다고 본다. 시편 19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편기자의 영성은 하나님의 보이는 우주 창조와 보이지 않는 우주 창조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즉 시편 19편을 쓴 시인은 외부의 영성과 내면의 영성이 이중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우주를 통으로 감지하면서 보이는 우주인 하늘과 창공과 낮과 밤 태양을 찬양 하다가 보이지 않는 우주 즉 내면세계를 묵상하고 있음은 두 번의 간구를 통해서 분명해 지고 있다.
결론
끝으로 이 간구에서 시인은 깨닫지도 못하고 부지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짓는 죄를 토설하고 무의식과 의식의 두 영역을 경험하고 자신의 무의식인 내면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간구한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영광인 보이는 우주를 찬양하던 시인은 불현 듯 자신의 무의식에 내재된 더러운 죄의 속성을 감지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란 것 같다. 보이는 우주를 자신의 입술로 찬양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우주인 자신의 내면세계의 죄의 모습을 감지한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낸다. 언어가 없어도 낮은 낮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하나님 지식을 전해준다. 이처럼 보이는 우주를 잔양하던 그는 자신과의 독백 속에서 자신의 속 내면의 우주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때때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다 자신의 실상을 갑자기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다. 언어를 모르는 창조세계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언어를 아는 창조세계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살았던가? 온 우주의 피조세계에 발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광채가 희미해 질 때 형편없는 자신의 내면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다. 보이는 우주의 크고 광활함보다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 우주에 가득하고 끔찍한 죄악의 실상을 묵도하며 이러한 실상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만하고 뻔뻔하게 거짓된 입술로 인간 우월을 내세우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건방을 떨고 있는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찬양하는 시인의 감수성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본 나에게도 사명임을 확인 한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