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며 인상을 써대는 개는 정말 무섭다. 그러나 요란스레 짖어대는 개는 무서울 게 없다. 짖는 개는 물지 않으니까. 영국 속담이다.
나귀가 이리에게 뒷다리를 물리고 투덜거리며 걸어가다가 사자 가죽을 발견하였다. 나귀는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길을 갔다. 그랬더니 온갖 동물들이 무서워 도망쳤다. 그는 짐승들의 왕이 된 기분이었다.
길가 숲속에서 여우가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나귀와 눈이 마주친 여우는 무서워 엎드렸다. 나귀는 더더욱 사자 시늉을 하느라 사자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여우는 꿇어 엎드렸던 자세에서 돌변, 잽싸게 나귀의 뒷다리를 물었다. 나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허풍쟁이 치고 큰 일 하는 사람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과장어법에 익숙하다. 대개 죽여 버리겠다든가 죽어버리겠다고 일생동안 수천 번을 한다. 살인도 못하고 자살도 못하면서. 내 손가락 장 지진다는 끔찍한 과장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런데 아직 손가락 장 지졌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하기야 그런 과장에 악의가 있다기 보다 절대적 마음 상태를, 또는 불변의 약속 등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강조 어법일 터이다.
예수님은 중요한 대목에서 반복어법을 사용하셨다. 이를테면 진실로 진실로가 그렇다. 소박한 강조법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강조보다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맞이하신다(시17:10)고 찬양하였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경우가 절대로 없을 것 같지만 실은 흔하다. 외국으로 입양되는 아기는 그 부모가 유기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기는커녕 영접하신다. 탕자 이야기(눅15장)가 이에 대한 주님의 확인이며,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
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는 확고한 약속이다.
두 번 반복된 과연은 절대로, 결코와 같은 뜻이다.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강한 의지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식으로 고쳐 쓰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버리거나 너를 떠나면 내 손가락으로 장을 지지겠다가 되지 않을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을 어찌나 사랑하시는 지 절대로 버리는 일도 없고 떠나는 일도 없다고 이렇게 의지적으로 강조하신 것은 그 신앙고백이 확실하게 옳았음과 너무너무 기쁘심을 나타낸 것이 아니면 무엇일까.
성경은 전반적으로 수식어에 인색하다. 설명에도 인색하다. 간단명료한 메시지다. 그래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해석이 엇갈린다. 그런데 히브리서 13장 5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아니다를 나태 내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손가락 장 지지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내 목숨 걸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며 보장이다. 와!!
우리 언어 습관은 과장이 심한 편인데 히브리서 13장5절은 오히려 축소시킨 것 같다. 원문에서의 다섯 번 부정이 영어성경에서는 결코(never)의 반복이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과연의 반복이니, 우리 하나님은 감정노출을 가급적 억제하시지만 그 사랑의 표현 강도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현 의 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