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아이온(Aeon)의 시간과 크로노스(Chronos or Chronicu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아이온의 시간은 오랜 시간 즉 시간의 영원성을 말할 때 사용하고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 자연적 시간이며 우리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이 가능한 시간 개념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며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이에 비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상황적 시간 즉 특정한 때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 개념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 개념이며 시간의 가치가 포함된 시간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설계자가 집을 설계하여 새로이 집을 지으려 할 때에 설계기간이나 건축기간을 정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착공일 완공일 입주식에 어떤 사람을 초청하고 어느 날에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로스는 알맞은 시간 옳은 시간 적절한 때를 지향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때로는 지혜와 결단이 요구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한다.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 즉 매일 한 번씩 낮과 밤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때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단어와 때의 계속을 가리키는 단어는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마가복음 1:15절에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한 “때”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지정된 시간이므로 이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우리의 신앙성장과 관계된 예수님의 섭리적 시간은 분명히 카이로스의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자연적 시간인 크로노스는 계획과 목적이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으며 태초라는 계획된 시간이 있었듯이 종말이라는 예정된 시간이 있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바로 그 날이 시간의 끝으로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인 카이로스의 시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뛰어들어 순간순간 자신과 관련된 카이로스의 시간의 삶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근본인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재의 나에게 특별한 의미와 뜻을 가지고 나와 관계된 사건으로 올바로 이해되고 믿어 질 때에 이제 그 사건은 나의 결단을 통해서 나의 시간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재현되어질 귀중한 크로노스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는 두 방향이 있다. 미래로 가는 시간과 미래에서 오는 시간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延長)인 것이다. 미래는 현재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이고 과거에 뿌린 씨앗이 현재에 꽃을 피우며 미래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미래는 어느 정도는 인간이 파악하고 장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써 정확하지는 않을 지라도 예측과 예견이 가능하기에 이러한 미래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전도서 1:9절에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라고 한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순간순간 흘러 과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020년 우리들에게 주어졌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면 각자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 살았던 크로노스의 시간이 많았었는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았던 카이로스의 시간이 많았었는지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시간은 분명한 카이로스의 시간이지만 진실한 겸손이란 인간의 자만심을 낮추는 것만이 아니라 분명한 때를 정하시고 그 때를 정확하게 이루실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지금 전에 경험 해보지 않은 세상과 환경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리던 각자의 걸음을 코로나의 빨간 신호의 멈춤이란 스티커를 받아 들었다. 예년의 지금쯤이면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모임으로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나름의 흥에 겨웠을 것이지만 지금은 거리를 유지하며 홀로 있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나아가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시간에서 조차 침묵을 해야 하고 마스크 쓰기는 이미 일상이 되어 진 것이 오래이다. 지금의 이런 모습들이 분주하게 살아왔던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삶의 방식이며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재앙 같지만 한걸음 뒤에서 생각하면 이처럼 큰 선물과 은총도 없을 듯싶다. 멈춤과 침묵과 홀로 있기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으로서 “주님께서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 타고 오심”이 실현될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싶다. 만약에 우리들의 영성이 기도원적인 삶을 일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면 그 이상이 코로나19로 실현되고 있기에 멈춤과 홀로 있기와 침묵함으로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