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지긋지긋한 코로나를 이기고 평범했던 일상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하지만 아직도 서로가 만나는 것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고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일상보다도 이후에 다가올 변화에 대한 염려와 불안한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언젠가는 분명히 코로나는 끝이 나겠지만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많이 변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서 애쓰며 산다.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애쓸 것이고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열심히 운동하며 살 것이고 명예가 중요하다고 여기면 실속보다는 포장과 과시적인 삶을 지향 할 것이고 학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식 공부시키는 데 모든 것을 투자하듯이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치라 여기며 자기 나름대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그 가치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까? 이런 어려울 때 일수록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이란 복음적 가치관으로써 성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실천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일 4: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합니다. 사랑으로부터 많은 복음적 가치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원한도 안 품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더 나아가 나눔과 섬김과 희생과 겸손도 사랑에서 나오는 복음적 가치들이며 수용과 용서 화해와 정의와 평화 역시 복음적 가치관이 분명하지만 한 가지의 전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복음적 가치관이기에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가치관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백작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평범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 중의 단편집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천사 미카엘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세 가지의 답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는 무엇이 없는지’. 마지막 한 가지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아 오라고 말씀하셨다. 천사 미카엘은 남편 셰몬과 아내 마르뚀나의 가정에서 정답을 찾아낸다.
그 정답은 바로 ‘사랑’ 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과 탐심으로 사랑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을수록 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서로 사랑이다.
정부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4차 지원금을 준다고 준비하고 몇몇 지자체에서도 별도로 지원금을 주겠다고 민심을 사로잡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당연히 피해를 보고 어려워진 분들에게 정부에서 지원을 통해서 그들이 다시한번 용기와 희망으로 일어서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지원해준 돈을 다 쓰고 난 후에는 공허와 허탈감이 찾아 올 것이고 다음에는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힘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정말 슬기롭게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진정한 에너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서로서로 보듬는 인정과 사랑일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은 한정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에너지는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기에 기독교 가치관의 의식의 수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기독교인의 의식 수준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제대로 인내하고 희생하고 심지어 원수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첫 말씀으로 회개하라고 외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사랑이라는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여 천국을 맛보려느냐? 그러려면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진정한 회개란 몇몇 잘못된 행위를 후회하면서 가슴을 치는 게 아니고 내가 변하는 것이다. 가치의 의식이 변하고 자신의 의식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고등 종교에 단 하나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일 것이다. 삶의 문제들을 법률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다양한 분야의 법률가와 전문가들 그리고 윤리학자들이 할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데 종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정부나 자선단체가 더 잘 도와줄 수 있다. 종교는 심지어 영적 의식을 기르는 데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영적 의식은 풍부한 삶의 경험을 통해 가질 수도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통해 영적 의식을 갖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단 하나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 수준의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한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엡 4:13) 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온전해 질 수 있다.”(엡 4:15)
끝으로 기독교인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기독교인의 의무로써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사랑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참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사랑으로 가능하기에 기독교인은 복음적인 가치관의 삶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