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창시절에 있었던 학교폭력 논란을 두고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학교폭력으로 트롯가수를 꿈꾸던 지망생이 중도 하차하였고, 여자배구 선수에 이어서 남자배구 선수도 학창시절 폭력으로 뉴스를 타고 있다.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은 "이재영과 이다영에게 무기한 출전 정지와 국가대표 박탈을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OSEN=곽영래 기자] youngrae@osen.co.kr
이재영과 이다영은 개인들의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두 선수를 향한 차가운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청화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삼일 만에 10만 명 이상이 동의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내편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상처가 누군가로부터 부당하게 받은 상처라면 잊혀 지거나 치유되기는 쉽지 않고 평생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기도 하다. 성경학자들이 시편 150편을 분류할 때 많이 나오는 유형 중에 하나가 개인의 탄식시와 공동체의 탄식시가 있다. 대표적으로 시편 35, 58, 59, 69, 83, 109, 137, 410편 등이며 이런 탄식시를 저주시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저주시편은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기에 시인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시인의 기도라고 하기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이런 저주시편을 시인 내면에 있는 깊은 상처의 치유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저주시편의 의미를 찾으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대화 상대이다. 시인이 악감정과 독설을 퍼붓고 있는 대상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악감정이나 독설은 성격이 달라진다. 사람을 향할 때는 저주가 되지만 하나님을 향할 때는 절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저주가 증오에서 나온다면 절규는 기도에서 나온다. 이렇게 증오와 기도의 바탕은 완전히 다르며 증오의 바탕이 마음이라면, 기도의 바탕은 영이다.
저주시편에서의 시인은 자신의 고통과 분노와 억울함에 복수심으로 들끓는 마음을 기도의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토해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상처는 치료가 되고 자존감은 높여지고 존재를 새롭게 빚어지는 영적 연금술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로 한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 대상은 대개 가까운 사람이거나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나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 관계에서 그런 일이 거침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을 힘 있는 자는 자기의 철학과 주관이고 성격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엄연하고 분명한 폭력이다. 성격의 솔직성은 양면의 칼이기에 자신의 거짓과 위선을 고백하는 용기는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약한 상대에게 자신의 성격이나 감정을 자신의 철학이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쏟아내는 무분별한 행동은 갑질이다. 감정과 욕망의 솔직성은 가해자에는 자기합리화의 도구이겠으나 피해자에겐 평생 헤어나지 못할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입히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대표나 부모나 상사 등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성격과 행동의 솔직성 때문에 평생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의 솔직성을 빙자하여 속생각과 속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행동은 분명이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성격과 감정에 솔직할수록 좋겠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성격과 감정을 절제할수록 좋다. 하나님 앞에서는 발가벗는 게 필요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옷을 입는 게 필요하다. 태초의 인간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창 3:7)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도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창 3:21) 이때의 옷은 위선의 상징이 아니라 동물이 희생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예표와 하나님의 은총의 상징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격과 감정을 절제한다고 해서 자신을 억압하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급한 성격과 감정의 절제가 신실한 신앙인일수록 분명하고 뚜렷하다. 급한 성격이나 감정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내면의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엡 4:26)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진실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급한 성격과 감정을 절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끝으로 저주시편에서 시인은 분노와 억울함과 복수심 같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둡고 부정적인 상처의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 했다는 것은 자기 존중의 뜻이며 그렇기에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했고 자신을 존중했기에 내면의 상처를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갔던 것이다. 내면의 상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상처이든 진흙이든 새 창조를 이루어 주시기에 그 과정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오롯이 하나님께 속한 신비이므로 내면의 상처는 치료됨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