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된 말씀에 부딪혀서 그 말씀 앞에 복종하여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 곳에 성령님의 강한 운행이 일어난다. 거룩한 성령님은 불의한 곳에 임하시지 않고 정결하지 못한 그릇에 임하시지 않지만 회개를 통해 거룩하게 되어진 그릇에 강하게 임하신다.
정결함과 기름부으심 이것은 마지막 때 가장 중요한 연간관계이다.
성령님이 임하신 그 그릇은 강력한 기름부으심이 있다. 성령님 그 분이 능력의 하나님이 시기에 그 분을 모신 깨끗한 그릇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능력만큼 사역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죄를 지음으로 견고한 어둠의 성이 쌓아져 있고 그 안에 이세벨의 영이 이 땅을 조정하고 있다면 지금이야 말로 강력한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가 일어나 불의의 성을 무너뜨릴 때이다. 한 순간의 은사적인 기름부으심으로 어느 집회나 동네에서 병을 고치고 예언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불의의 성을 쌓아서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 체계와 어리석은 백성들 속에 잘 못 자리 잡혀있는 체제를 부서뜨릴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사 10:27)
성령님의 강한 기름부으심을 통해 사탄이 우리를 옭아 맨 줄이 끊어진다.
지금은 강력한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때이다. 사역을 할 때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기름부으심이 없이는 너무나도 힘들다. 그런데 지금은 어두운 영이 이 세상을 강하게 옭아매고 있는 때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없이 어떻게 어둠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구약에 실제로 이세벨을 무너뜨린 사람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 (기름부으심)을 받은 엘리사가 기름 부은 예후가 이세벨을 죽였다. 예후의 기름부으심은 실로 대단했다. 직접 칼을 빼어 이세벨을 친 것이 아니라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세벨을 내어던져라!”라고 명령하자 이세벨의 측근이 성 박으로 이세벨을 내어 던져 버렸다 (왕하9:33) 말 한마디로 사람이 움직였다. 이것이 기름부으심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름부으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기름부으심에 대한 갈망함이 있어야 한다.
이 기름부으심에 대한 열망은 은사적인 것으로만 바라보아 단순히 능력을 구하는 그런 것과 틀리다. 은사적인 기름부으심만 구해서 집회 때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만을 구하는 그러한 은사주의자들의 기름부으심과는 틀리다.
마지막 때 이세벨의 영을 물리치는 기름부으심은 이 시대의 악함을 보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정의의 의분을 지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그러한 정결한 자에게 강력히 임하는 능력의 기름부으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역자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바른 분별함을 가지고 있고 빼앗긴 하나님의 영토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분노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여 이 땅의 악에 대하여 주님의 엄위함을 선포한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이러한 사역자에게 기름부으심의 최고 단계인 권능이 임한다.
이 권능은 단순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단순한 사역적인 능력, 기름부으심이 아니라 이 세대를 정면으로 맞서서 잘 못 된 것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세상의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공의를 펼친다.
엘리야는 혼자서 그 시대의 정권자인 아합과 이세벨과 정면으로 맞섰다. 지금으로 말하면 어느 성령집회에서 병을 고치는 그러한 사역이 아니라 어떤 사역자가 한 국가에 맞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권능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하다.
각 영역에 빼앗긴 것이 너무나도 많다.
세상 가치관을 가장 빨리 접하게 되는 학교. 이곳의 적그리스도적인 시스템을 꾸짖고 변혁할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필요하다.
나라를 엎드려치는 세력이 득실한 국가 기관 한복판에 들어가서 악한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라고 소리치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일어나야 한다.
거짓이 판치는 미디어 영역 중심에 서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선포하는 그러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