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통해서 그 땅은 거룩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저주와 사망 권세를 이겼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는 거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워 하는 것이 남을 위한 회개이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남이 저지른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이미 엄청난 죄를 지어서 그 땅을 더럽혀서 그 땅이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대한민국 수도 한 복판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고 동성애자들이 벌거벗고 거리를 행보하고 있는데 나는 도저히 그들 앞에 힘을 쓸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악이 팽창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말 무기력해 보이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한 고민들을 기도를 깊이 해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 자체가 중보자의 첫 걸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 땅이 더럽혀져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부패함과 어려움을 보고 마음이 상심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땅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회개하며 중보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근심이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이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애통한 마음으로 그 땅에 대해서 대신 회개하며 중보하는 물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진정한 중보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와 열방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거룩함에 대한 책임은 교회에게 있다. 하나님은 항상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 땅이 황폐한 것도 교회에게 책임을 묻는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돌이킬 수 없게 황폐해 지고 음란해 졌다면 더 늦기 전에 중보자들이 일어나서 기도해야 한다.
자신이 음란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이 음란하지 않아도 그 땅이 그렇게 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놓고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첫 부분이 중보에 대한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중보자적인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어떻게 중보를 게을리 할 수 있는가?
지금 이세벨의 영으로 이 땅이 황충먹고 폐허가 됬다면 진리된 성경말씀으로 일어선 강력한 중보자들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중보하는 자가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셨다.
자신만 배부르고 자신과 자기 가족만 괜찮으면 모든 것이 좋아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크리스천에게 주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들의 양심을 건드리신다.
“이 땅이 저주를 받아 멸망받게 되면 그 때 너와 네 가정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네가 살고 있는 그 땅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 너의 기도 한마디가 내가 진노의 잔을 그 땅에 쏟아 붓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 너는 그동안 무슨 기도를 했느냐? 너의 건강, 네 자녀의 안녕, 항상 너와 네 가정에 대한 기도만 하지 않았느냐? 니가 서 있는 그 땅이 징계를 받지 않도록 너는 중보하라!”
지금도 이 양심의 메시지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울려 퍼진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도 자신이 범죄한 것 처럼 마음을 찢고 애통해하면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중보이다.지금은 이러한 중보의 사역이 정말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라 인간의 내면의 부패함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면 쉽게 분노하고 잘못된 것을 잘 지적하지만 그것을 놓고 중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 대해 중보를 하라고 했지 판단 정죄를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2:1)
요즘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분노하며 강대상에서 분노의 불을 쏟아내는 설교자를 많이 본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잘잘못을 따지며 분노하며 이 사회가 잘 못 되었음을 설교하는 설교자는 많았다. 그러나 진작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 땅의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구조를 놓고 애통해 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설교자는 많이 보지 않았다.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그 내면에 분명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불의가 있는 것이다. 그 뿌리를 분별하고 그 땅이 그렇게 되어진 것에 대해서 기도하는 중보자가 정말 필요하다.
이세벨이 아합시대 때 모든 사회에 불의를 심어놨고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 땅은 패역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이 사회가 정상이 되어질지 어떤 것부터 잘못된 건지 모를 정도로 어지럽게 변했다.
그러나 가장 어두울 때 항상 부흥은 있어왔다.
하나님은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심기어 놓으셨다.
가장 어두울 때 가장 강력한 빛이 필요한 법이다.
이 빛은 중보라는 것을 통하여 시작된다.
그 동안의 부흥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 사람의 중보자가 그 땅을 놓고 기도할 때 시작됐다.
어디부터 손봐야 이 땅이 회복될지 모를 때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 엎어져서 이 땅을 놓고 기도하면 된다. 그 기도부터 부흥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