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수를 믿고 난 후 생기는 갈등은 하나의 코스처럼 다가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을 보자. 그의 삶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기가 무색하게 갈등했고, 그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잉태하고 난 이후 하갈은 사래와 갈등이 있고 그로인해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다. 그래서 도망을 가게 된 하갈은 하나님이 집으로 돌아가 사라에게 순종할 것을 말씀하신 이후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 되돌아갔고, 이스마엘을 순산하였으며,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다(창16:16). 아브람이 99세가 되던 해까지 아브람의 가정은 평안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사라가 이삭을 낳고 난 다음 아브라함의 가정에 다시 갈등이 시작됐고, 이 갈등은 자녀 이삭으로부터 시작된다(창21:9). 이로 인해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아우성을 친다. 머리가 복잡해진 아브라함은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하지만 잘 안 됐다.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도 육의 복을 줄 것이니 그의 가정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삭으로 말미암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는 다시 약속을 하셨다(창21:12) 약속을 정말 믿는지를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 것을 명하고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갈등의 문제가 끝이 난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믿는 자의 갈등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마음에 율법(양심)을 갖고 태어난다(롬2:14-15). 죄의 종살이를 할망정 그 율법을 따라 산다.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이다. 출애굽을 한 뒤에도 어려움이 생기기만 하면 그때마다 애굽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돌아가자고 하니 출애굽을 하게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을까(민14:4). 그런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보이시고,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한 선택한 민족이었기에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어려움 속에서 그들을 항상 도우신다. 하지만 출애굽 1세대들은 결국 그들 안에 있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갈등과 불신으로 죽는다.
이 광야여정 속에서의 갈등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난 거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겪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으며 유난히 갈등으로 어두운 세월을 보냈다. 갈등은 성령 충만 받으면 해결된다고 일러주기에 항상 성령 충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도하고 난 이후 그 순간만 갈등으로부터 벗어났지, 곧 원위치가 되었다. 금식을 하면 된다기에 금식을 했다. 그러나 보호식이 끝나면 곧바로 원위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를 되뇌었고, 늘 갈등 안에서 살았다(롬7:24). 다른 사람들 눈에 나는 성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소위 기도 많이 하는 목사였지만 정작 내가 나 자신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늘 갈등했고, 갈등으로 인해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으로 하나님 섬기는 일에 허점으로 가득했던 내가 보이는 목회 사역에 집중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갈등으로부터 벗어난 지금 과거의 시간들을 뒤돌아보며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 목회를 잘하는 것 중 무엇이 우선인가?’란 질문을 던졌을 때 당연히 전자가 답이 됐어야 했다. 눈에 보이는 목회를 잘하는 것이 목사 자신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위로나 정답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목회를 잘한다고 한들 진정한 의미로서의 목회를 잘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길을 모르는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갈등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이 마땅함에도 ‘과거의 나’는 이를 무시한 채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갈등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의 갈등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해결된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갈등에서 자유하게 됐다.
심각한 갈등의 문제를 안고 기도굴에서 성경을 베개하고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목사가 두 종류가 있다고 하시면서 7장 목사와 8장 목사가 있다고 꿈속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7장 8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당황하기도 했지만 감이 떠오르지 않아 성경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을 보니 내 마음의 전쟁터와 똑같았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을 보니 이 갈등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등장했다. 로마서 7장과 8장을 반복해서 읽는 가운데 며칠 만에 답을 찾게 되었다. 아니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해답이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나,” “내가,” “나의”로 시작되는 구절이 많았는데 전부 내가 죄와 갈등과 싸워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내가 죽고 성령으로 사는 삶”이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깨달음이 내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내 것이 된 것이다(요8:32). 할렐루야!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자유를 주시는 복음임을 쉽게 믿어지게 되었다(약1:25, 2:12).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고, 입술로도 늘 내뱉었던 말이었지만, 이것이 내 경험으로 확실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체험하고 성도들에게 집중적으로 자유의 복음을 가르쳐오고 있다. 그런데 성도들도 좀처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가르치는데도 성도들은 여전히 내가 죄와 싸우면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금식으로 이기려고 한다. 밤을 새워가며 은혜를 구하는 것도 내가 이기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노력으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결론을 얻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요5:39).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신앙생활 중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을 말씀해주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구하며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살게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갈5:17, 24) 거기에 성화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니 가능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7-8) 오늘 나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본다. 그리고 성령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 간다(골1:6)고 말씀한 것을 기억하고 깨달음을 통한 믿음을 얻으려고 한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한다(롬14:23)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삼상16:7)앞에 나를 내어놓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려고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면, 나도 나를 보면 예수가 보이는 삶을 살기로 믿음으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