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집이 있다. 소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다. 교회에서 서로간의 성격으로 부딪힐 때 참아주고, 배려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인성교육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공동체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에 아침운동을 하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더니, 우리가 듣고 있던 음악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러기에 속이 상했다. 왜, 그렇게 하냐고 그랬더니, 자기 맘이라고 했다. 누구나 다 자기 맘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몇 마디 다투었다. 며칠이 지난 후 후회가 됐다. 그러지 말걸, 그냥 참을 걸, 아이들에게 인성을 가르치면서 내가 왜, 그랬지! 인성교육이란 나의 성격을 참아내기 위한 것인데, 그러지 못한 나를 자꾸만 되돌아보았다. 그냥 참았으면 지금까지 편안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원칙이 있다. 그것을 깨기는 어렵지만 가끔씩 우리를 훈훈하게도 한다. 그것은 그 철옹성 같은 원칙에서 융통성이 나올 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용서하시던 그 원칙을 깨고 우리도 용서할 수 있도록 해 주시니, 세상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막상 부딪히면 내 속에서 용서는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이 미움과 혈기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 내가 겪은 바로는 지속적인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답이다. 매 순간 예민하게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권능이 임하고 모든 사람 앞에 증인으로 서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성은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의 소중한 순결을 준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오늘도 사랑을 실천하며 권세 있는 자가 되기 위해, 쉽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깨면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에 아침운동대신 기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이야기는 좋은 말이 아니면 하지 말자. 버릇처럼 남을 탓하는 나의 태도는 이기적인 것이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이 될 뿐이다. 내 안에 있는 사랑과 권세를 남김없이 뺏어갈 뿐이다.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권세를 소유해야 한다. 만약에 하나님이 원칙을 그대로 지키셨다면,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를 살리셨다. 그리고 그 권세는 우리 안에 유전자로 들어와 자리 잡았다. 아버지의 모든 자녀들에게 남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DNA이며 혈통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아버지의 자녀이다. 그러니 우리는 권세가 있는 자로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도님들이 와서 간증한다. 오랫동안 묵었던 감정을 정리하고 성령님의 은혜로 가족들과 화해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상함과 미움이 성도의 권세를 막았었고, 주님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권세이다. 용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므로 자녀로서 누려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됨을 내려놓고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또한 권능을 받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세상 사람과는 다른 권세를 가져야 한다. 오늘 우리 예수소망교회에는 이 바람이 불고 있다. 미움을 내려놓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오순절의 권세가 불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