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설립, 서구 체육문화 소개와 체육교과 편성
이화학당 체조교육과 관련 보수층의 반발이 심해
우리나라에 근대 스포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4년 조선시대 말엽 감오경장을 전후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1884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들은 한국에 기독교계 학교를 설립해 선교와 개화를 위해 현대 교육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이 학교들은 우리나라에 서구 체육문화를 소개하면서 체육과목을 교과과정에 편성해 근대 스포츠를 도입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개화 엘리트들은 근대식 관립학교와 사립학교에 체육과목을 정식 교육과정으로 편성했다.
이는 곧 공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교육초서의 발표로 이어졌다. 1895년 2월 2일에 발표된 교육초서에 보면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知養)이라는 근대교육의 3대 강령이 들어 있다. 이 교육초서에 따라 학교마다 체육과목을 채택하고 운동회를 자주 갖게 됨으로써 근대 스포츠의 각종 경기가 점차 퍼져 나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개념의 스포츠가 소개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는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계 학교에서 처음 체육이 실시되었으며, 이후 기독교청년회가 체육을 사회적으로 저변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근대 스포츠의 보급은 기독청소년회의 출범 이후라고 보면 된다.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은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근대 스포츠를 과외활동이나 특별활동을 통해 활성화하였다. 이들은 과외활동으로 연설회, 토론회와 같은 집회와 함께 야구, 축구, 정구, 농구와 같은 서양식 운동경기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에서도 영어, 한문, 한글 및 성경 등 정규과목외에 오늘날 체육의 ‘유희’ 개념에 해당되는 ‘오락’을 오후시간에 배정했다. 1891년에 교과목이 개편되며 체조가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편성되자 매일1교시 30분을 체조시간으로 할당했다.
1886년(고정 23)에는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M.F 스크랜튼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 정동)에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이화학당 설립 초기엔 체육관련 과목이 없었으나, 1892년 페인이 교장으로 부임한 후 체조과목이 새 과정으로 편성됐다. 그러나 당시 이화학당의 체조교육과 관련 완고한 보수층의 반발이 심해 사회적 윤리문제로까지 비약돼 큰 말썽을 빚기도 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이 열렸던 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운동회가 영어학교 교사 겸 선교사인 영국인 허치슨의 지도 아래 열렸다. 이어 1897년 6월 허치슨은 동대문 운동장 자리인 훈련원에서 오늘날의 육상경기대회와 영어학교 대운동회를 개최했다. 그는 체육계뿐만 아니라 교육계의 공로자로 인정되어 1897년 5월 고종으로부터 종 2품 금장을 특별히 하사받기도 했다.
1903년 발족한 기독교청년회(현 YMCA)는 체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청년회 안에 체육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터너, 총부에 미국선교사인 질렛을 임명했다. 이후 체육부는 스포츠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계몽에 주력했고, 특히 총무 질렛은 서구의 각종 스포츠를 회원들에게 가르쳤다. 1905년에는 질렛에 의해 야구가 도입되기도 했다. 190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팀인 ‘대한 체육구락부’가 탄생되었고 이어서 자전거 경기가 개최되었다. 1907년에 도입된 농구 역시 질렛에 의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회원들에게 소개되었다. 결국 한국에 근대 스포츠가 전래되었던 정황을 보면 외국 선교사들의 기여가 컸던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