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는 절기를 이길 수 없나 보다. 매서운 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잃고 있다. 2월 19일 우수(雨水)가 지났다. 우수는 비와 물이다. 눈보다는 비가 내리는 날이 많고 그 빗물은 대지를 적시는 물이 된다. 물은 다시 봄기운을 받고 만물을 깨어나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깬다는 경칩(3월 5일)을 기점으로 봄은 완연해 질것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봄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왔다. 겨울이 가는 것이 아니고, 봄이 오니까 겨울이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옷장을 정리하다가 학교 때 입던 잠바를 발견했다. 이런 잠바를 입고 쏘다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개성 있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는 나만의 멋이었다. 사람들에겐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 One of Them(원 오브 뎀)이 아니라, The OnlyOne(디 온리 원)이 되고 싶은 욕구 즉 개성(personality)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말이다.
개성(personality)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튀는 옷을 입거나 과감한 노출도 꺼리지 않는 대담한 여성일까? 귀고리나 코걸이를 하고 손톱에 매니큐어까지 칠한 야리야리한 남성일까?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기행을 일삼는 예술가일까? 어떤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전문가일까? 군계일학(群鷄一鶴)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연예인일까? 개성을 분류하자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경험” 개성과 “본질” 개성이 그것이다. 경험 개성은 말 그대로 성장과정 중에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개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천적 이기보다 후천적이며, 본질적 이기보다 우연적(accidental)이며, 심층적 이기보다 표층적이다. 그렇기에 경험 개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학창시절 의식깨나 있다는 학생들이 신발과 옷을 자유분방하게 신고 입고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젊은 학생들의 나름의 개성인 때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학창시절 패션은 청바지에 야전잠바? 란 군복 입은 모습이 많았다. 그 당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청바지와 야전잠바 군복 입은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낯설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고 다녔고 패션에 대한 특별한 고정관념은 없었다. 물론 그 당시는 누구라도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청바지에 야전잠바 군복을 입었을 뿐 최첨단 유행을 따른 것은 아니었을 지고 모른다. 경험 개성의 바탕에는 각 개인의 타고난 성격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따르면 열여섯 가지 유형이 있고,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아홉 가지 유형이 있다. 성격 유형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구성되는 경험 세계도 다양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개성도 다양하다는 뜻이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꽃밭이 아름답듯이 개성은 다양해야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험” 개성의 수명은 그렇게 길지가 않다. 시대적인 모방과 유행을 통해 획일화하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어떠신가? 예수님의 개성은 자신만의 향기를 갖고 개성 있게 사역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개성이 돋보이는 장면이 산상설교에 나오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구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심으로써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상투적이며 인습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셨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1-22)
살인뿐 아니라, 간음에 대해서도, 이혼에 대해서도, 맹세에 대해서도, 보복에 대해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같은 방식으로 당시의 율법적 고정관념을 뒤집으셨다. 예수님의 개성이 돋보이는 사건 중 또 하나가 안식일에 일어났다.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라새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하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있는 제단 빵을 먹은 일화를 꺼내면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8)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만의 개성을 확고하게 지니실 수 있었을까? 핵심은 간단하다, 예수님은 타인의 인정이나 시선을 의식하시지 않고 유행의 시대적인 개성을 추종하지 않으심으로써 욕망에 뿌리내린 경험 개성을 포기하시고 “본질 개성”(essential individuality)을 지향하신 결과이시다.
결론적으로 본질 개성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본질 개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경험 개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안타깝게도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본질 개성보다는 탐욕스러운 이미지, 배타적인 이미지, 뻔뻔한 이미지, 완고한 이미지, 고집불통 이미지, 수구적 이미지가 개성으로 굳어져 동시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014년에 이루어진 〈종교별 이미지 평가〉를 보면, 종교지도자의 자질을 묻는 문항에선 응답자의 43.9%가 천주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했고, 34.5%가 불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한 반면, 개신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23.8%만 우수하다고 대답했다. 교세확장을 묻는 문항에선 개신교(59.3%)가 천주교(22.9%)나 불교(23.7%)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도자의 의식 수준이 낮고, 교세 확장에 관심이 많다는 이미지가 개신교의 개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다가오는 만물이 소생(蘇生)하는 봄과 함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개성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영과 혼과 몸이 사랑으로 떨며, 사랑의 에너지를 내뿜고, 천진난만하고 유쾌하며 유머가 샘솟고, 억압됐던 호기심이 살아나 경이로운 눈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본질 개성을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의 부흥과 이미지 개선(改善)은 개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험 개성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질 개성을 추구(追求)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신성한 개성, 즉 그리스도인다움의 꽃을 활짝 피우는 개성(個性)의 회복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