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14)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낮과 밤을 나뉘게 될 광명체를 만드시고 그것으로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과 음력 즉 달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낮과 밤을 나누는 해와 달을 기준으로 만들어 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는 아이온(Aeon)의 시간과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아이온의 시간은 오랜 시간 즉 시간의 영원성을 말할 때 사용하고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이며, 자연적인 우리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이 가능한 시간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상황적 시간 즉 특정한 때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다. 크로노스가 일반적인 시간 개념이라면 카이로스는 목적성의 시간 개념이며 하나님의 징조와 계절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설계자가 집을 설계하여 새로이 집을 지으려 할 때에 설계기간이나 건축기간을 정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착공일과 완공일을 정하고 지인들을 초청하고 어느 날에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로스는 알맞은 시간 옳은 시간 적절한 때를 지향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때로는 지혜와 결단이 요구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의미와 목적이 있는 시간을 말한다.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 즉 매일 한 번씩 낮과 밤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시다. 낮과 밤이 바뀌고 날과 해를 이루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게 하셨지만, 징조와 계절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먼저 징조란 다른 표현으로 표적을 말하며 히브리어는 모페트 이며, 헬라어(σημεῖον) 세메이온 이다. 표적'(表蹟, sign)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을 말하며, '표징'과 동의어다.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 해 주신다.
그렇다면 계절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계절(seasons)은 절기를 말하며, 히브리어 “모하딤” 인데, 창1:14절 말씀에서 “계절”이 히브리어로 “모하딤”이다. 모하딤은 “정한 때, 정한 것”의 의미가 있으며, 계절이 정한 때에 정한 것으로 오듯이 절기도 어김없이 정한 때에 정한 것으로 규정하시고 여호와의 절기라 말씀하셨다.(레23:2)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일과 월삭과 7대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제일, 장막절)를 지킬 것을 명령하시고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카이로스적 시간표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때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단어와 때의 계속을 가리키는 단어는 구별하여 사용하신다. 마가복음 1:15절에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한 “때”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지정된 시간이므로 이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우리와 관계된 예수님의 섭리적 시간은 분명히 카이로스의 시간인 것이다.
2023년도 어느덧 마지막 달을 바라보며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면 각자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 살았던 크로노스의 시간이 많았었는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았던 카이로스의 시간이 많았었는지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시간은 분명한 카이로스의 시간이겠지만 진실한 겸손이란 자신의 경험아나 자만심을 낮추고 분명한 때를 정하시고 그 때를 정확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시간표 앞에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으며 태초라는 계획된 시간이 있었듯이 종말이라는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시간의 끝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인 카이로스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하나님과 관련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근본인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재의 나에게 특별한 의미와 뜻을 가지고 나와 관계된 사건으로 올바로 이해되고 믿어 질 때에 이제 그 사건은 나의 결단을 통해서 나의 시간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재현되어질 귀중한 카이로스의 사건이 된다.
끝으로 시간의 흐름에는 두 방향이 있다. 미래로 가는 시간과 미래에서 오는 시간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延長)인 것이다. 미래는 현재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이고 과거에 뿌린 씨앗이 현재에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결과이다. 따라서 미래는 어느 정도는 인간이 파악하고 장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써 정확하지는 않을 지라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미래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전도서 1:9절에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라고 고백했듯이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정한 때인 시간표를 인식하고 징조와 계절을 아는 삶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