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일이지만,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타 종교보다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에서 2020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종교별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불교와 천주교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대다수(86.8%와 83%)가 과거와 “비슷하다”고 답한 반면, 개신교의 경우 72.6%로 “더 나빠졌다”는 대답이었다. 한편 2014년에 이루어진 〈종교별 이미지 평가〉를 보면, 종교지도자의 자질을 묻는 문항에서 응답자의 43.9%가 천주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했고, 불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34.5%가, 개신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23.8%만 우수하다고 대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교세확장의 정도를 물었을 때 개신교(59.3%)가 천주교(22.9%)나 불교(23.7%)에 비해 훨씬 높았다. 지도자의 의식 수준이 낮고, 교세 확장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것이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다. 또 이 조사는 한국교회를 이기주의적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과도하게 헌금을 강요하며, 목회자의 사리사욕이 심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말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이런 저런 행사를 한다고 교회마다 현수막을 내어걸고 있지만, 정작 세상에서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시민사회의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의식의 수준이란 인간의 발달 단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학자들 중에서는 의식의 수준을 다섯으로 나누는 장 갭서, 일곱으로 나누는 토머스 키팅, 열로 나누는 제인 뢰빙거, 열둘로 나누는 켄 윌버가 있지만, 의식의 수준은 크게 셋으로 나누면 충분하다. “합리적”(rational) 의식을 기준으로, 합리성 이전의 “전이성적”(pre-rational) 의식과 그것을 초월하는 “초이성적”(trans-rational) 의식이 그것이며, 의식의 수준에 따라 신앙의 양상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성찰하려면 의식의 수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의식이 “전이성”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반드시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신앙인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합리적 이성이나 욕망을 변형시킬 신성한 직관이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만연한 “번영신앙”은 전이성 수준의 의식에서 비롯한 신앙 행태이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이나 초자연적 힘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적신앙은 여기에서 기인하여 나온 것이다. 번영신앙의 동력은 성공・축복・부흥・성장을 꿈꾸며 달려왔던 강렬한 욕망이다. 나아가 번영신앙은 건강과 부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신학적으로 포장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있다. 전이성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이성이 발달하지 않고 직관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정통과 이단 따위의 흑백논리에 쉽게 민감해 지고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이 자신과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라는 독선과 혐오와 배제는 전이성 차원의 전형적인 신앙 행태의 양상이며,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다.
그러나 한 신앙인의 의식이 “합리적” 차원에 이를 때 신앙은 욕망보다 이성의 영향을 받게 된다. 신앙은 더 이상 욕망 성취의 수단이 아니란 것을 자각하게 되고,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기복신앙과 기적추구에서 벗어날 수 가 있으며 사랑・정의・평화・생명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 진리는 전통과 권위를 통해 전달되는(deliver) 것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발견하는(discover)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주제들을 전통적인 신학이나 교리의 틀로만 제한하여 보지 않고 사회성과 인간성과 공감성에 바탕을 두고 이성의 렌즈로 보려고 하는 시도가 가능하다.
하지만 합리적 의식 수준의 신앙의 위험성은 지나친 머리 중심의 사고를 조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간파한 대로 지식은 교만에 이르게 한다.(고전 8:1) 그래서 머리 중심의 신앙은 이념적・논리적 우월성에 빠지기 쉽고, 교리적으로 발전하여 신앙의 배타성에 빠지게 될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참 그리스도인의 의식이란? 의식이 “초이성” 차원으로 상승할 때 신앙은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자아 속에서 선생으로 굴림 하던 율법의 굴레에서도 해방될 뿐 아니라, 머리 중심 신앙의 이념적 경직성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의식이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와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가슴이 열리게 되고 감수성이 살아나고 새로운 인식 능력이 생성한다. 이 생성된 인식 능력이 “직관”이다. 직관이 깨어나면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경험이 가능하다. 직관이란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와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깨어나는 통합적인 영성이다. 영성이 회복되면, 하나님의 경험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우주의 우리은하 밖의 안드로메다보다도 멀리서 존재하시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대상이기보다 지금 내안에 현존하는 신성한 영이시다.
끝으로 이런 하나님의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행 17:28)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경험의 반영이시다. 하나님은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심”(골 3:11)을 담론이 아니라 리얼리티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온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이며, 하나님 현존의 보증이 된다.
이런 “하나님의 의식”으로만 욕망은 비워지고, 상상은 정화되며, 생각과 감정은 영성에 부합하기에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배타성,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끼어들 틈이 생겨나지 않고, 의식은 대양처럼 활짝 열려 낯선 것이나 다른 것들까지 받아들이시는 예수님 의식의 소유함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