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 하셨다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사람에게 말을 하고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분명하다.
세상에 말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자신의 중심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이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업어진 물과 같다고 한다. 말의 엄중함과 미치는 영향은 말한 당사자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있다. 무의식중에 말을 하거나 자기가 한 말을 금세 잊기도 하고, 때로는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거나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말로 우기기도 한다, 또 교묘한 말 속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상대방을 기만하여 실리를 챙기기도 한다. 말이라는 것이 일상에서 늘 친근하게 사용되고 익숙하게 내뱉어지는 것이지만 말의 독선. 교만, 가식은 어떠한 무기보다도 강력(强力)하여 사람의 인생을 망하게도 할 수 있고, 흥하게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다. 흔히 우리는 상대를 향하여 이중인격 (二重人格) 자라는 말을 자주한다. 이중인격의 사전적인 의미는 인격의 통일성에 장애가 일어나서 생기는 이상 성격을 일컫는다. 안타깝지만 교회가 세상을 품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선교의 현장에서 인정받아야 함에도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고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사실에는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모임과 공동체 안에서 사용하는 말은 어느 집단의 공동체보다도 순화되고 긍정적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말들을 자주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세상의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다름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3:18~20)라고 말씀하신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수고는 주님 앞에서 하나도 헛됨이 없다. 물가에 심긴 과일나무가 사시사철 아름다운 과일로서 결실하고 그 가지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우리의 모든 애씀이 주님 안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으로 맺어져 갈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으니 위험성을 깊이 인식하며 하늘의 지혜와 지도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충고이다. 우리는 말의 온전함을 위해서 간과(看過) 하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신앙생활을 좀 했다 하는 이들은 자꾸만 누군가를 가르치려하고 선생이 되려고 한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이러쿵저러쿵 조언과 격려와 충고와 가르침들을 쏟아내 자신의 권위를 말로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통해서 유익을 얻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환경과 처지가 다르기에 자신의 일천한 경험으로 모든 것을 보편화하여 자신의 말이 절대적인 답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는 이들이 수용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우리의 지식과 삶에는 한계가 있기에 아는 것에 있어서도 부족하고 또한 내가 말하는 대로 사는 일에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분명한 이치(理致)는 많은 말보다 자기가 한 말과 같이 살고자 노력하는 행실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가르침과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지도자가 된 이들은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그런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은 말하는 것보다 먼저 온전한 자가 되길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모습만이 더 많은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이로 살아 갈 수 있으며, 내가 말한 대로 내가 설교한 대로 온전하게 살고자 노력해야 하는 다른 한 가지는 내가 하고 내가 전한 말로 결국 내가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혀는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는 분명한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런 위험성이 워낙 크다보니 많은 동물들은 길들일 수는 있지만 사람의 혀를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말하지 않고 살기는 정말 힘들다. 대신에 말을 절제하고 조절하고 분별하는 일은 훈련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날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중심의 생각이 혀에서 말로 나오고, 우리의 사유와 지식과 앎이 결국 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을 잘 제어하는 것과, 때에 맞는 말과 삶이 일치된 모습들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비난받는 기독교인들이 말의 분별과 온전함을 이뤄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잠4:23~24)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을 의미한다,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이고,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코람데오 곧 하나님의 면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믿는 삶,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정직해야 하는 것은 말의 온전함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