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시대정신(時代精神)이란 어떤 시대의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그 시대를 지배하고 특징짓는 정신을 의미한다.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樣式) 또는 이념이며 이 말은 1769년 독일 헤르더가 처음 사용한 이래 괴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러 역사적 과정과 결합한 보편적 정서, 민족정신과 결부된 현대적인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곧 유럽과 미국에 확대되고, 급속도로 발전하여 19세기에는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서구의 자본주의 개념은 현재의 MZ 세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교육은 사회에서 자기중심적으로 내가 어떠한 인간인가, 절대적인 자신의 기준과 수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관계 중심적 인간에 집중 해 왔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연과 주변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며, 곧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고 배려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상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동양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타협을 중요시 하며, 소외되는 계층을 잘 아울러야 한다는 전체 공동체의 책임을 가르쳐 왔다. 분명한 사실은 코로나19는 시대에 강압적이며 반문명적 태도를 자연을 통해서 얘기해 주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코로나가 우리에게로 달려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인류 전체가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화 되면서 무분별하게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자연의 피드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코로나19 이후의 미래 전망은 낙관보다 불확실성에 무게 중심이 놓인다.”고 말했다. 앞으로 바이러스는 더욱 진화하고 팬데믹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기에 이런 불확실한 미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공공의료 등 공공성의 강화 및 국가의 연합과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더욱 깊은 신뢰와 협력으로 나누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 공통체적 삶의 정신에 있다. 고 볼 수 있겠다.
본론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는 선택적 정의니 선택적 공정이니 따위의 말을 듣는다. 남에게는 정의를 요구하면서 자기에겐 적용하지 않을 때 그것을 선택적 정의라고 한다. 남이 부모찬스를 쓴 것은 비난하면서 자기가 그런 것엔 관대할 때 그것을 선택적 공정이라고 한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부 정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선택적 지각은 대화할 때도 일어난다. 자기의 생각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상대의 말은 선택적으로 듣는 것이다. 선택적 경청은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기에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신앙생활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의 뜻은 받아들이지만 이해할 수 없거나 자기를 변화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다. 일종의 선택적이고 조건적인 순종이다.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을 보면 선택적 순종 때문에 망한 사람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삼상 15:9) 선택적이고 조건적인 순종 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선택적이고 조건적인 순종을 고발하면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셨다.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뿐이지 않았더냐?”(렘 7:23) 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끝까지 선택적이고 조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망하는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정말로 감사한 은혜는 이렇게 선택적이고 조건적이며 개인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려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조건적 순종이 어떤 것임과 공동체적인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시고 사사로운 욕망과 감정을 거슬렀지만 자기에게 닥친 십자가를 감당하셨다.
결론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시대정신에서 찾는다면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인 배려에 있음을 생각한다.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사람을 기꺼이 나누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의 정신이다. 모세의 순종과 정신이 그랬다. 그는 살인죄를 짓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했다가 거기서 가정을 꾸리고 편안하게 살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쉽게 순종 할 수 없었다. 모세는 자신의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고 견고히 다져진 행복프로그램이 해체될 두려움에 하나님의 초청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며” 순종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을 도와주시겠다고 해도 모세는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란다면서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타협하려고 한다. 모세의 이야기는 전폭적인 순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주며 모세의 이야기는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으로 자기중심의 정신에서 어떻게 공동체적인 정신으로 순종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이 대답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고후 1:2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고통스럽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공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사랑을 지식적으로 알고 외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공동체적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하고 그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남의 생각과 의견을 경청해주는 자가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자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