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일생의 여정에서 평안과 행복이라는 일상을 염원하고 살지만 분명히 사람마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좁은 문’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좁은 문’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좁은 문’은 어려움 또는 힘듦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박봉의 월급을 받는 부모의 처지에서는 자식 대학 들어가서 학업을 마치기까지가 그토록 어려운 줄 몰랐다며 푸념들을 한다. 대학을 보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좁은 문’일 것이다. 학업을 다 마치고 사회의 첫발을 딛고 나오는 청년들은 구직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며 한숨짓는다. 역시 청년들에는 취업이 ‘좁은 문’ 일 것이다. 장성한 선남선녀[善男善女]라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같이 당연해야 할 연애가 어렵다며 탄식하는 젊은이들을 많은 것은 분명히 그들에게는 연애와 결혼이 ‘좁은 문’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상의 일들이 다 같을 진대 ‘좁은 문’같이 여겨지는 일들이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자녀가 공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농부가 계절의 바뀜을 좆아서 농사하는 것처럼 나름의 때와 시기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눅 13:24) 말씀하신다. 신앙의 영적 여정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하고, 사막에서 기도 하고, 광야에서도 기도 한다.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입회하여 금욕이나 고행도 빼놓을 수 없다. 금식을 하면서 눕지도 않고 잠도 안 자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수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상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하늘에도, 스올에도, 동녘 너머에도, 바다 끝 서쪽에도 계시기 때문이다.(시 139:7-1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행 17:19)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편만[遍滿]하심을 예수님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셨다. 그런데 이토록 쉬운 일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자신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이성과 자신의 본질 자아인 영적자아를 간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적자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광활한 현존[現存]과 무소부재[無所不在]와 편만하심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런 알아차림은 아주 멋진 경험이며 영적 여정이 가져다주는 은총이다. 그래서 이 은혜를 경험했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할 때 영적 자아가 깨어나고 영적자아가 깨어날 때 “하나님의 온갖 충만[充滿]하심으로 충만하여”(엡 3:19)질 수 있기에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빌3:8)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각성[看過]을 간과한 영적 여정에 대한 담론은 무의미 한 것이다. 하나님도 천국도, 영생도, 구원도 영적자아 성취와 관련된 담론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도 25년 이상이 걸렸고. 야곱도 20년 이상이 걸렸다는 바로 앞에서의 고백이다.“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9:9)실토했다. 하나님의 창조섭리[創造攝理]는 영[靈]이 이성[理性]을 이성이 육신[肉身]을 다스리도록 창조 하셨건만 신앙생활의 세월이 지나면서 희미해진 영안은 더 어두어져서 큰일이 아니고 난리가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심령은 굳어져서 양심의 느낌마저 무뎌진 세속의 기독교인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쫒다가 생기는 이런 저런 소식들은 듣기에도 보기에도 민망함을 넘어서 하나님께 죄송하고 같은 길은 가는 신앙인의 마음에서 무거울 따름이다. ‘착근’(着根)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1.옮겨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림 2.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고 삶.”이라고 나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사는 신앙의 여정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며 이성을 각성하고 영적자아로 살기로 전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착근’(着根)이다. 착근이 되었으면 반듯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구습”(엡 4:22) 지・정・의 모든 차원에 각인되어 있는 세속적인 프로그램을 해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영적자아로 살아가려면 거짓자아의 배후인 사탄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엡 6:12)의 계략에 속지 않아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성도의 모양보다는 성도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고 세상보다 앞장서서 달려가야 함에도 안타깝게도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걱정하고 의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듯이 혹시 늦었을 지라도 우리 성도들의 어두어진 영안[靈眼]의 밝음이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