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허다한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많은 재앙 들 중에서 가소로울 만큼 어이없는 이유로 혹독한 긴 고생과 대규모의 생명을 잃은 사건은 603,548명이 38년에 걸친 고달픈 광야의 나그네 인생길에서 사망한 사례가 으뜸일 것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들은 그들의 입으로 죽음을 불러들였다.
출애굽으로부터 2년 5개월쯤 경과하는 동안 난생 처음 경험하는 환경 속에서 엄청난 고생길을 걸었다. 마침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그들이 정착해서 살게 될,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였고 그래서 그 약속 지키려고 10회의 재앙 끝에 출애굽의 기적으로 자유민이 된 그들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북으로 80km에 이스라엘의 최남단 성읍 브엘세바가 있고,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사흘길에 불과하다(창22:4).
목적지가 턱밑이다. 그런데 12명이 가나안 땅을 40일이나 샅샅이 살피고 와서 보고란 내용은 절망적이다.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절대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격해 들어가면 우리는 그들의 밥이라고 하였다. 출애굽 이후 갈증의 황량한 광야에서 떠돌던 그들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예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원망이나 불평은 불만이 그 뿌리다. 불만이 화근이다. 싸움도, 미움도, 이혼도 살인도 불만이 근원이다. 불만은 603,548명을 광야에서 죽게 한 원인이다. 너무 어이없는 죽음이다. 불만이 불행의 근원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하였다(빌4:11). 자족이란 외부적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만족, 감사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외부조건에 눌린다. 90평에서 살다가 15평으로 옮겨가도, 장관으로 지내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도, 사령관에서 일등병으로 강등되어도, 화재로 공장이 날아가서 거지 신세가 되어도 그래도 괜찮아야 한다. 자족이란 그런 것이다. 불만 제로가 자족이다. 범사에 감사가 자족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다. 우리는 욕심도 탐욕도 나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부지기수지만. 그 욕심 또는 탐욕의 뿌리가 불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간과, 대수롭지 않게 여김이다. 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만이라는 뿌리가 욕심과 죄의 근원이다. 불만은 화근이다. 불만이 생기면 저절로 불평이 나온다. 하나님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하셨다(잠18:21).
그래서 약한 자도 나는 강하다고 말하라는 것이다(요엘3:10).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린다(잠13:2). 그럼에도 불만은 문제될게 없다는 게 보편적 인식이다. 불만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불만에 있다.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먹도록 허락받았으나 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선악과를(창3:6) 못 먹게 하다니. 이게 불만이다. 그 작은 불만이 인류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었다.
불만의 뿌리에서 자라난 탐욕은 세상을 다 가져도 불만이다. 우리 입으로 내뱉는 불만의 뿌리에서 나오는 불평 소리, 그 원망과 비난과 분노와 미움과 낭패의 소리, 하나님께서 지금도 들으신다. 그리고 하나님 귀에 들린 그대로 하나님께서 시행하신다고 경고하셨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불만이 이혼을 초래한다. 불만이 절도나 강도나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뿌리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가도 거기가 지옥이다. 불만은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욕심에서 온다. 우리가 간과하는 불만이야말로 화근이다. 하나님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이 시행하시겠다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이며,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시행하리라(요14:13-14)는 주님의 약속까지 있으니 과연 우리가 불평해야 되는지 기도해야 되는지 알만하다.
현 의 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