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건 말도 안 돼 할 게 적지 않다. 이를테면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란다.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면 10리를 가 주란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때리라고 대주란다.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란다. 구하는 자에게 주란다. 백만 원을 달라고 소송을 걸어오면 2백만 원을 주라는 것이다.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가. 어떤 인간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사람의 형상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니 그리하고도 남을 테지만 탐욕과 자만에 젖어 살아가는 인간이라 그리할 수 없음을 잘 아시는 주님이신데 그렇게 하라니 정말 기가 차다.
사람은 그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수준의 이런 기가 찬 내용을 왜 가르치셨을까. 그게 궁금하다. 100미터를 12초에 달리는 청년이 이제 겨우 발걸음 떼는 조카에게 너도 나처럼 100미터를 12초에 달리라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처음 교회에 나가면서 복음서를 읽다가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5장을 만나 하 어이없어 성경을 덮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기록자 세리 마태의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 중심의 인간적인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문득 입장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고 하니 뺨을 때린 쪽에서, 오리를 강요한 쪽에서, 돈을 꾸어 달라고 한 쪽에서, 소송을 건 쪽에서 생각해본 것이다. 그러면 조금은 수긍되는 측면이 있다. 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갑의 입장이다.
한 대 때렸는데 더 때리라고 다른 뺨을 대주면 때린 쪽이 의아해지거나 어쩌면 당황할 것이다. 방어하거나 폭력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더 때리라면 때린 사람이 얼떨떨해질 것이다. 내 짐을 지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였는데 오리를 가더니 내가 오리를 더 가주겠다고 나오면, 황당하리라. 자기가 상대편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터이니. 소송도 그렇다.
100만원 달라고 소송을 건 갑에게 을이 200만원 들고 와서 소송을 취하해 달라면, 어리벙벙해질 터이다. 이렇게 입장만 바꾸어 생각해도 정말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신뢰관계로 돈독하게 되는데도, 적이 될 상대와 아름다운 친구가 되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바보나 할 짓인데 정말 그리하면 바보짓이 아니라 예찬할 지혜로움이다.
피해자들, 강요당하거나 소송 당하거나 폭행당한 입장에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면 관계는 악화되고 문제는 확대된다. 그런데 주님이 하라는 그대로 하면 손해가 확대되고 바보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지혜로움을 넘어 주도적인 헌신이 된다.
어떤 일에든 주도적 입장이 되면 적극적이며 능동적이 되어 피곤하지 않고 싫증나지 않고 능률적이 된다. 피동적인 입장이면 힘들고 짜증나고 능률은 오르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이랴.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평화롭고 행복해진다. 손해 보아도 기쁘고 피곤해도 살 맛 나고 여유로워진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순종하는 삶에는 감사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것이 바른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시비비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할 따름이어야 맞다.
현 의 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