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년간의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그 다음 해에 이태리의 페테리코 팰리니 감독이 자기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영화 <길>을만들었다. 내가 그 영화를 본 때는 한참 후였다고 기억된다. 50년대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둑과 창녀와 상이군인이 거리에 넘쳐나던 시절이다. 스토리가 단조롭고 배경 또한 이리저리 떠도는 길과 길, 광대의 천막이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유독 주제곡 가사의 일부가 선명하다. 첫 소절 <오 젤소미나>와 그 리듬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떠돌이 광대에게 팔려 함께 떠도는 젤소미나는 지능이 부족한 처녀인데 광대 차력사 잠 파노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 받지는 못한다. 구지 주제를 더듬어 보면 젤소미나가 가는 곳마다 심는 토마토 씨가 막연하게나마 그녀의 희망을 심는 것인가 한다.
길이 있으면 길 가가 있다. 길은 어떤 목적지로 이동하는 데 긴요하다. 길가는 멈추는 곳이다. 쉬기도 한다. 길을 가는 사람은 길가에서 마냥 쉬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생은 수십 년의 긴 여정이다. 쉬어가야 할 때가 있다. 계속 길을 가면 지친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어디냐에 있다. 그가 가는 길이그가 가려는 목적지에 도달하느냐에 있다. 도로번호는 세계 공통이다. 홀수번호는 남북 방향의 길이고, 짝수 번호는 동서방향의 도로다. 1번 국도로 열흘을 달려도 동쪽이나 서쪽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길의 끝은 남쪽이거나 북쪽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가는 길은 하나뿐인데, 지상에 워낙 길이 많다보니 천국 가는 길도 여럿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어떤 종교를 믿든 진실하게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가리켜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라 한다.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를 배척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예수는 길이다. 망하는 길, 죽는 길이 많지만 이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여기서 생명이라 함은 반드시 한 번 죽는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지상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 산이나 들이라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길을 만든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에 산길 논길 밭길 오솔길 등등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드는 길이다. 실제적으로 편리를 위하고 빠름을 위하여 길을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길, 그 진리의 길은 사람이 만든 길이 아니다. 만들지도 못하고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워낙 길이 많기에 구원의 길도 여기저기 흔하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양의 성자로 추앙 받는 공자가 ‘아침에 길에 들을 수 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하였는데, 석가는 길을 찾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 길이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은 몰랐다.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길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좁은 문 좁은 길, 가
는 사람이 적은 그 길이 구원의 길이다.
현 의 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