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와 함께 포로기 이후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 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됐는데 외적으로는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고 내적으로는 무너진 신앙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성전은 포로에서 귀환한 후 20년 만에, 성벽재건은 90년쯤 지나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는 적들의 방해와 위협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전정신의 부족, 식어버린 신앙열정 때문이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모두 하나님께 감동되어 당장에라도 모든 일을 다 이룰 것만 같았습니다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이후 외적재건을 마칠 즈음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영적재건과 부흥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영적재건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시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힘쓴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듣는 일이었습니다.(8장) 하나님 말씀이 중심된 국가재건이었는데 이로 인해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9장) 자신들의 죄된 과거를 깨닫게 되면서 통곡하며 참회했습니다. 그리고는 중대결심을 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 그것을 기록한 후 도장을 찍었습니다.(9:38)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겠습니다.(10:28-30) 안식일과 성일을 지키겠습니다.(10:31) 하나님의 성전 운영에 필요한 것을 자원하여 후원하겠습니다.(32-34절) 첫 소산, 첫 열매, 첫 수확, 가축의 첫 새끼를 드리겠습니다.(35절)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37-39절)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였습니다. 그때 이 언약에 맨 먼저 도장을 찍은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들, 제사장들(2-8절), 레위인들(9-13절), 백성의 우두머리들(14-27절), 그 외에 남은 모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주로 맹세했습니다.(10:29)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결심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실천입니다.
11장과 12장은 헌신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중 하나가 ‘누가 예루살렘에서 거주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 이것이 뭐가 어려울까 싶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나라의 수도요 중심도시잖습니까?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이 무조건 ‘인-서울’ 해야죠.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은 최전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지만 치안이 가장 취약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지방으로 이주했고 예루살렘은 슬럼화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인구를 재배치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원칙을 정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했고 백성의 1/10을 제비뽑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1절) 그런데 이와는 상관없이 자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절) ‘자원은 최고의 헌신’입니다. 이로서 공동체재건은 은혜롭게 이루어지게 됐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이런 헌신이 우리에겐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이는 반드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구약시대 선민들의 삶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하여 신약시대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헌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나, 시므온, 나사렛의 요셉, 마리아, 동방박사들, 목자들, 세례요한… 이들은 모두 메시야 시대를 연 헌신의 전령들이었습니다. 신앙을 몸으로 삶으로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헌신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위대한 삶을 꿈꾸신다면, 부흥을 원하신다면, 헌신의 길로 나아갑시다.
배성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