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일 : 2018-09-15 23:45:00
한인선교사의 가족이 된 일본 아이들
만남과 시련, 그리고 사랑과 소망
우리 사모는 남의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겻에 대해 처음부터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아니 절대 반대였다. 양육가정 교육을 받을 때 동경도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사토고 때문에 당신들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 때는 주저 말고 아이를 우리에게 되돌려 보내세요’라고…. 그러나 지금은 나보다 사모가 더 아이들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쁘고 고맙기만 하다. 사토오야제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2012년2월2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여기에 다시 소개해 본다.
#만남
강기두 목사(52)와 아내 천행화 사모(47)가 일본 도쿄(東京) 시내 한 아동보호시설을 찾은 것은 7년 전인 2005년 어린이날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2년 9개월 된 남자아이가 마룻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쇼오지였다. 5월이지만 아직 바닥은 차가울 텐데…. 천 사모가 아이를 안았다. 잠시 후 깨어난 아이에게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라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한 번도 그렇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담당직원이 말했다. 쇼오지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병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엄마는 작은 인형 하나만 곁에 남겨두고 사라졌다.
쇼오지를 두 번째 만난 날은 함께 외출해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집으로 데려왔다. 밤이 돼 재우려 했지만 침대를 무서워했다. 새벽녘이 돼서야 베개를 가슴에 껴안고 몸을 웅크린 채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보호시설로 함께 돌아갔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자 “그럼 바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보통은 아이가 사토오야(里親·위탁양육 부모)와 친해질 때까지 조금씩 만나는 시간을 늘리면서 몇 개월이고 관찰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영문을 몰랐다. 쇼오지에게 “우리가 엄마 아빠란다. 이제부터 같이 살자”고 하자 아이가 처음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데리러 왔어….” 쇼오지는 조금 더 기다리면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1988년 일본에 정착한 강 목사 부부는 슬하에 이미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토오야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TV 프로그램 등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힘이 닿는 한 한 명이라도 따뜻한 가정에서 자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도 대찬성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막내딸이 제일 반겼다. 결심이 서자 도쿄 도의 사토오야 프로그램 문을 두드렸다. 일본에는 한국인 사토고(里子·위탁양육 자녀)도 적지 않다. 강 목사 부부는 일본 어린이를 선택해 한국인 사토고를 키우는 일본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한국인 부모와 일본인 아들 사이의 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련
쇼오지를 데려온 뒤 1년간은 집에서만 키웠다.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던 쇼오지는 새벽녘이 돼서야 지쳐 잠이 들었다. 자동차와 자전거도 무서워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가 자전거 뒤에만 태우면 울었다. 먹을 게 보이면 토할 때까지 먹으려 했다. 보호시설에서는 정해진 시간에만 밥이 나오니 최대한 먹어두는 게 습관이 된 듯했다. 한번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는 내 얼굴은 왜 없냐고 물었다. 부랴부랴 가족사진을 다시 찍어 걸었다. 다행히 쇼오지는 빠른 속도로 가족의 일원이 되어 갔다. 주변의 일본 지인들도 아이 옷을 선물하면서 격려를 잊지 않았다.
강 목사 부부의 평온했던 삶이 뒤집힌 것은 1년 뒤 쇼오지를 유치원에 보내면서부터였다. 쇼오지는 매일같이 여자애들을 꼬집고 할퀴고 깨무는 사고를 쳤다. 쏟아지는 부모들의 항의에 천 사모는 파김치가 됐다. 뒤늦게 알고 보니 쇼오지의 악행은 아동보호시설에서도 유명했었다. 매뉴얼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서둘러 쇼오지를 내준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럴수록 쇼오지를 감쌌다. 사랑으로 감싸주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쇼오지의 사고 수위는 갈수록 높아졌다. 다른 부모들의 항의를 견디다 못해 유치원을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
초등학생이 돼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책상 위를 걸어 다니기 일쑤였다. 방과 후가 되면 매일같이 걸려오는 같은 반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를 견뎌내야 했다. “쇼오지 때문에 학교에 평화가 없으니,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보내지 말라”는 전화도 있었다. 담임선생은 급기야 쇼오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업고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강 목사가 쇼오지의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다른 사람도 꼬집히면 이렇게 아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 다음 날이 도쿄 도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위탁아동 면담일이었다. 쇼오지가 “아빠가 꼬집었다”며 멍 자국을 보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아동학대라는 오해를 살 뻔했다.
#사랑
도쿄 도에서는 미안해하며 아이를 보호시설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기른 정을 거둘 수 없었다. 마침 주변에 아동상담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 지인이 있었다. 아이를 보이자 심각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라는 진단을 내렸다. 쇼오지를 데리고 병원을 찾자 우려대로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쇼오지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도쿄도 히노(日野) 시로 이사한 뒤에는 처음으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엄마 아빠를 깜짝 놀라게 했다. 새로운 동네에서는 쇼오지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쇼오지의 표정도 부쩍 밝아졌다. 엄마가 담근 김치를 먹으며 “우리 엄마가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어. 다른 애들은 이런 거 못 먹어볼걸” 하면서 치켜세울 줄도 알게 됐다. 요즘은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걸 제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