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hard Apenzeller, 1858-1902) 선교사님은 1858년 2월 6일 필라델피아 근교인 소더턴(Souderton)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메노나이트(Mennonite) 출신의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환경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까지 줄줄 암송할 만큼 대단한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생가를 방문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구매해서 살고 있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 주인이 잔디를 깍다가 나를 보고 대뜸 아펜젤러 생가를 찾아 왔느냐고 질문하면서 바로 여기가 그 분의 생가라고 이야기 해 주셔서 나는 우리 그룹을 인도해서 다,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했더니 anytime wellcome! 이라고 했는데, 우리 팀이 갈 때는 주인은 없고 고요해서 마음 놓고 기도하고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첫 걸음으로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로 향했다. 그 교회는 immanuel leidy's church로 되어 있는데 과거 아펜젤러 선교사가 다녔던 교회는 지금은 God's Quest Ministry로 사용되고 있고, 교회는 더 크게 부흥을 해서 위에 웅장한 건물로 우리를 맞이했다. 역시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부흥케 하시고 이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마지막 주자로 사용하심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감사했다. 기록에 의하면 1872년 서들턴(Souderton)에 있는 임마누엘 개혁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이 교회는 독일계 개혁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경건한 교회였다. 그 교회 사무원에게 옛 교회를 보고 싶다고 말하고 열쇠를 받아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서 가족들이 묻혀 있는 묘지로 향했다. 사실 에펜젤러 선교사는 1985년 4월 5일 부산을 거쳐 제물포 도착했다가 한국은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남아있고, 아직 개방되지 않은 상황이라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6월 16일, 헤론(John B.Heron) 부부와 스크랜튼 박사의 모친, 처자와 함께 다시 한국행에 올라 드디어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함께 한달 이상을 제물포에서 머물다가 7월 29일에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분의 교회 사역으로는 1897년 12월 26일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국내외의 헌금으로 그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 성당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건축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에 온 첫 선교사로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셨고,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좋은 친구로서의 짧은 인생을 사셨다가 가셨지만 그가 한국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 크시다.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한 교회 사역을 구현한 선교사로서의 본분에도 충실하셨고,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으로 좋은 지도자들을 양육하셔서 한국 독립과 개화에 앞장 서셨다는 것과 함께 한국 성도들을 위한 성경 번역 사역에도 활동하신 인물이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 사람을 사랑해서 배 충돌 사건으로 죽어가는 여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이셨다.
과거 남미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들은 정복자로서 한 손에 칼,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죽임으로 하는 선교사들이었지만,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섬겼던 죽음으로 사역하셨던 선교사님들이라 너무나 감사를 한다. 지금 나도 콜롬비아 선교사로서 사역하지만 그 분의 마음과 같은 자세로 임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해외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외국으로 파송할 바람직한 선교사 상은 바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미국에 와 머무는 짧은 기간이지만 좋은 기회를 얻어 우리가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서 그 분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는 것이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콜롬비아 김 선훈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