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산물... 우 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 새문안 교회를 소개 합니다. 새문안 교회를 살피다 보면 하나님의 일에 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로스 선교사의 준비가 언더우드를 통하여 이 땅에 선교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단을 떠나 때론 협력하고 때론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교회를 이전한 그 모습들이 이 시대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흔적을 엿 볼 수 있는 교회이며 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 온 지 1년 여 만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푼 언더우드목사는 그 후 다시 1년 여 후에 한국의 서울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소래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세워진 개신교회였다. 1887년 9월 27일에 만주에서 온 로스 목사와 광혜원의 설립자인 의사 알렌과 14명의 신자들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정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서상륜과 백홍준 두 사람을 장로로 피택하여 임직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새문안으로 장소를 옮겨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었다.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라 불리어진 이유는, 옛날 돈의문을 세워 그것을 ‘새문’이라 하고 그 안쪽을 새문안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이 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전도를 통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언더우드 목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권서인들이나 매서인들을 통해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로서 세례를 언더우드에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1887년 9월 30일에 쓴 언더우드의 편지는 새문안교회의 설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밤에 우리는 이 땅에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여기 참가한 한국교인의 수는 14명이었고, 지난 주일에 또 한 사람이 등록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매일매일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사업이 일취월장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언더우드는 황금시기인 20대 젊은 나이에 만주 우장(심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15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존 로스 선교사를 새문안교회 설립예배에 초청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로스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890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신약성서 일로 배를 타고 서울에 갔다. 배편은 유일한 수단이었고 편했다. 도착한 날 저녁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저녁이었다. 나를 안내한 언더우드 씨는 그날 저녁에 작은 무리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 자신의 작은 예배당에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친절한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는 그와, 그의 학교 학생과 동행했다. 넓은 길을 가로질러 갔는데 동양의 대부분 도시들처럼 불이 없어 어두웠다. 조그만 등을 든 한국인의 안내를 받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작고 빈 안뜰로 들어섰다. 우리가 대문을 두드리자 그 문이 열렸다. 종이를 바른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옷을 정제하고 학식 있어 보이는 남자 14명이 거기에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그날 밤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의 제일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는 일이었다. 이의 없이 두 사람이 선출되었고, 그 다음 주일에 안수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봉천에서 온 사람의 사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6년 전부터 신앙인이 되어 있었고, 그런 관계로 이 첫모임에 참석했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교회를 세운 세례교인 14명 중 13명이 그 사람(봉천에서 온)이나 그 뒤를 이어 봉천을 떠났던 다른 사람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사실은 그 도시에 그들과 같은 계층의 교인이 300명 이상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언더우드가 창립예배를 드릴 때 그들이 사용한 성경은 존 로스가 막 완성한 예수성교전서였고, 그날 참석한 자들이 로스가 양육한 서상륜과 그 동생 서경조에 의해 전도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이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스는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장로교회들이 계속 서울에 설립되었다. 1893년 곤당골교회가 설립되었고, 이 교회는 홍문석골교회와 연합하여 1898년 승동교회를 조직했다. 1894년에는 기포드(D. L. Gifford)의 책임 하에 연동교회 전신 연못골 교회가, 1909년 11월 21일에 남대문교회가, 이어 안동교회가 설립되어 1913년 9월에 교회봉헌식을 거행했다. 장·감은 경쟁을 피하면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서울과 경기 지역 복음화를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을 ‘남부지구’, ‘중앙지구’, ‘동부지구’, ‘서부지구’로 대별하고 선교사들이 각 지역을 책임 맡아 순회선교를 했다. 새문안교회는 1894년 감리교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연지동으로 이전하고 새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