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히브리인(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인해 박해 가운데 있었고 이로써 ‘기독신앙을 고수할 것인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유가 있었습니다.
●기독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기력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잠깐 후에 다시 오시겠다던 주님의 재림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재림에 대한 신앙이 점점 약해지면서 믿음이 무기력해졌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박해와 앞으로도 예상되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받고 있던 유일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교의 압력과 회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거죠. ‘유대교인으로 있으면 신앙으로 인한 박해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생활도 이어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일반화합니다. ‘종교는 다 같은 거야. 신을 의지하므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좋은 일하고 착하게 살자는 거지. 아무 종교면 어때?’ 이런 얘기를 들으면 믿음이 약한 신자는 ‘그런가?’라는 생각에 휘청합니다.
●이와 더불어 유대교 전통에서 자란 이들에겐 기독교 예배의식이 단조로워서 시시하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유대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된 장엄하고도 화려한 의식과 예전들, 그리고 제사장들의 폼나는 복장 등등… 겉으로 볼 때 뭔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당시 유대계 크리스천들 중에 많은 이들이 모이는 것을 등한히 했고(10:25) 어떤 이들은 고난과 박해로 인해 믿음에서 물러섰고(10:32-39) 어떤 이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13:3-9) 다행스러운 것은 히브리후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성도들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듣는 중에 영혼에 혁명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당시 히브리서의 처방은 이랬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유대교와 비교하여 논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다 나은’ ‘더 좋은’이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될 수 없으신 ‘비교불가’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을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모세의 부모, 여호수아, 기생 라합, 기드온, 삼손, 사무엘, 다윗, 선지자 등등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 절대 믿음이 이제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속죄, 영생, 재림, 천국… 이 모든 것을 ‘보고 믿을 것이 아니라 믿고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시련은 1세기 크리스천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2000년 기독역사 가운데 계속되어 온 믿음의 시련이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2년 동안 계속되어 온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비롯해 어떻게 하든지 절대 진리를 상대화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에 대해 흠을 내고 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으로 안티기독교문화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하고 회의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히브리서의 말씀을 듣고 읽는 중에 ‘영혼의 진동’을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배성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