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랑보다 더 큰 신앙 덕목이 없으니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 실천의 구체적 의미는 떨어집니다. 사랑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막10:45)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섬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세 개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섬김 혹은 봉사라고 번역됩니다. 섬김의 기본 의미는 식사를 할 때 시중을 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는 ‘훼페레테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눅17:8절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요12:2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먹을 때 시중을 드는 상황에서 섬김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합니다. 먹는 행위는 모든 문화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갓난아이, 장애우, 혹은 중증 환자가 아니라면 굳이 누가 돕지 않아도 스스로 채우는 것이 당연한 기본 욕구입니다. 그런데 그 먹는 일에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이는 곧 “플러스알파”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전에 네팔에 있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주간 집중강의를 하면서 네팔 목회자 가정에 머물며 식사를 가족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할 때 마다 그 목사님의 딸들이 식사 준비를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을 나르고 물을 따라주고 식탁을 차리는 것과 식사 도중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옆에서 대기하면서 한 끼 식사를 마치는 동안 섬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작은 것이었지만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굳이 그런 시중을 들지 않더라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없어도 되지만 있음으로 인해 플러스알파의 경험을 제공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섬김입니다. 기본만 제공한다거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더 높은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웨이터나 웨이트리스가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서비스와 같은 것입니다. 이 서비스는 사람의 격을 높여줍니다. 대접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섬김이 작은 감동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찾아 섬겨봅시다. 내 의무를 행하기 위해 행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에게 플러스알파의 경험을 제공해주는 섬김을 실천합시다. 아내와 남편, 부모님과 자녀, 주위의 이웃, 옆자리 성도들을 위해 플러스알파의 경험을 제공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감동의 물결로 채워질 것입니다.
오규훈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