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은 27장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담담히 예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2절) 그리고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개발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라고 합니다.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려 빠르면 3일 최대 열흘까지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이로써 사형수의 수치와 고통을 극대화하고 군중들에겐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주로 정치범에게 행했는데 이는 당시 로마 정부가 가장 신경 썼던 것이 반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팔리리라’고 하셨는데 이 단어는 신적 수동태로 주체가 하나님일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비록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또 가룟유다가 합세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음모에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역사 연구의 대가였던 토인비의 결론이 그랬습니다. ‘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실 날을 유월절로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26:26-28).
이는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영생을 얻어 천국에 이르려면 ‘예수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기독교를 독선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를 비웃고 모함하며 때론 정치적 권력을 동원하여 합법을 가장하고, 또 출판과 언론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하며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온 마음으로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결코 적당하게, 편안하게, 취미생활 하듯 신앙생활을 할 순 없을 것입니다. 삶의 이유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코로나 상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했습니다만 다시 한번 예수님 앞에 신실하길 결심해야겠습니다.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생활을 위해 가장 기본되는 것은 주일을 성수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삼가야 합니다. 키에르 케골의 얘기처럼 ‘인생은 40부터가 아니다. 20부터도 아니다. 십자가로부터이기’ 때문입니다.
Way Maker(길을 만드시는 하나님)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시니치라는 여성 찬양사역자가 성령의 감동 중에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배성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