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삶의 양약과도 같습니다. 아마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나름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묻지마 폭행이나 살인, 방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요인 역시 위로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욥 역시 많은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욥은 믿음이 아주 독실했던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인생 절벽을 만났던 것입니다.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부자였지만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순간에 재산과 열 자식을 모두 잃게 되었고 거기에 심한 피부병까지 들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몸도 많이 상했습니다.
욥의 이런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왔습니다. 이들 역시 욥을 보고 깜짝 놀라며 슬픔을 표현했고, 욥과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고는 한마디도 말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친구들의 위로를 통해 욥은 잠시 정신을 차렸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욥을 향해 사정없이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바스라는 친구는 모질고 무섭게 공격을 했는데,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이니 입을 다물라고 말하며 더욱 강하게 다시 욥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위로하러 온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욥이 정색하며 반박을 했습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 이것은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재난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재난을 더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말을 듣고 있으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통스럽고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나 태도에서 전혀 위로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다’하며 반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경우에도 교훈하려 하거나 충고하면 안 됩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첫 번째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가’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하는 말이 다 일리가 있고 맞는 말인데 내겐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말을 해줬지만, 그 솔직한 말, 옳은 말, 바른말이 위로가 되지 않고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만으로는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위로가 느껴져야 위로인 것입니다.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소식을 듣고 위문과 위로를 하러 왔는데, 이 위로와 위문이 공감입니다. 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하고 함께하고 함께 울며 어깨를 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수준 높은 공감입니다. 근심을 풀어주고 아픔을 줄어들게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바랐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근심이 풀어지고 아픔이 줄어드는 한마디 말’이었던 것입니다. 위로의 핵심은 근심과 아픔 중에 있는 이들이 나의 위로를 통해 근심이 조금이나마 풀어지고 아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욥이 원했던 위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위로자가 있습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와 ‘근심을 풀어주고 아픔을 줄어들게 하는 위로자’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서 당신은 어떤 위로자가 될 것입니까?
배성태목사